침묵의 공간을 그린다. 이는 모든 감각과 감정, 생각과 기억과 상상이 폭발하듯 존재하는 생(生)의 현장이다.
기억과 감정과 생각이 폭발할 듯 뒤엉켜 마음이 복잡할 때면, 그것의 실체를 알아내고자 말로 풀어내고 글로 기록하고 단어를 나열하여 정리해보곤 했다. 하지만 감정과 기억과 생각이 얽혀 존재하는 정교한 무의식의 현장은 언어라는 좁은 틀만으로는 정의될 수 없어 곧 휘발되고 만다. 수많은 말로도, 다양한 언어로도 발화될 수 없는 마음의 형상을 다만 조용히 바라보고 싶다.
침묵하는 회화는 기억과 감정, 생각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어떤 말보다도 섬세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침묵으로 은유 되는 ‘바라보기’로부터 깊어지고 보존되는 감정과 기억의 공간을 회화에 짓는다. 말로써 칭할 때 그것의 진의는 언어에 온전히 담기지 못하고 휘발된다. 우리는 단지 마음으로 응할 뿐,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섬세하고 강한, 그리움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조용한 침묵이다.
수증기가 응결되어 서서히 부피를 키워가는 물안개와 구름처럼 움직이고 변화하며 부유하는 생각과 기억, 감정을 소리 없는 회화 안에서 응시하고자 한다. 수증기가 응결되어 안개와 구름이 되는 과정은 나의 감정과 기억이 형상화되는 과정과 닮아있다. 수증기가 서서히 가시적인 형태를 갖추듯, 무형의 감정과 기억도 점차 화면에 드러난다.
군청의 깊은 여백은 나의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색은 고요함과 깊이를 상징하며,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는 여백의 창과 같다. 이는 깊은 바다나 광활한 하늘이 되기도 하고, 침묵과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며, 감상자의 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푸른 침묵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내면의 목소리를 바라볼 수 있다.
2024 12. 작가노트 중